콰이어트 (수전 케인)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틀릴 위험이 있을 때조차 빠른 판단을 선호한다.


여러분이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조용한 성격에 대한 선입견이 깊은 정신적 고통을 남기기도 한다는 점을 알 것이다.


‘성격’이라는 단어는 18세기 이전에는 영어에 존재하지 않았고, 좋은 성격이라는 개념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널리 퍼졌다.


“무더운 여름날 텍사스에서 한 가족이 베란다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말합니다.
‘아 지루해. 우리 애빌린에 갈까?’
가족이 애빌린에 도착하자 누군가 말합니다.
‘있지, 솔직히 나 별로 오고 싶지 않았어.’
그러자 옆 사람이 말합니다.
‘나도 오고 싶지 않았어. 난 네가 오고 싶은 줄 알았다고.’
이런 식으로 흘러가죠. 군 내부의 어떤 그룹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지금 우리 애빌린으로 가는 버스에 타고 있는 느낌 이네요’ 하고 말하면 붉은 깃발이 올라간 겁니다. 거기서 대화를 끝내도 되죠. 이것은 군의 아주 강력한 문화유산입니다.”

‘애빌린으로 가는 버스’ 일화는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을 따라가려는 사람들의 성향을 보여준다. 그 행동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브리검영대학교 경영학 교수 브래들리 에이글은 128개의 주요 기업 CEO들을 연구하여 최고경영진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이들이 연봉은 더 많이 받았지만 실적은 좋지 않 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오스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에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집단 브레인스토밍이 실제로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 후로 40년간 연구 결과는 똑같이 놀랄 만한 결론을 제시했다. 연구들은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성과가 나빠진다는 것을 밝혔다. 9명씩 묶은 그룹은 6명씩 묶은 그룹보다 아이디어 수도 적고 질도 떨어졌고, 6명씩 묶은 그룹은 다시 4명씩 묶은 그룹보다 성과가 나빴다. 조직심리학자 에이드리언 퍼넘은 이렇게 썼다. “과학적 근거를 보면 기업 사람들이 집단으로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재능 있고 의욕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창의성이나 효율이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는 혼자서 일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이것의 한 가지 예외는 온라인 브레인스토밍이다. 연구 결과, 온라인 집단 브레인스토밍은 적절히 관리만 하면 개인적으로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낼 뿐 아니라 집단이 커질수록 결과도 나아졌다. 학문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온라인으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협력하는 교수들은 혼자서 일하거나 얼굴을 보고 협력하는 교수들보다 더 영향력 있는 연구를 발표한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 애초에 ‘새로운 집단사고’가 생겨나도록 공언한 것도 온라인 협력의 이런 흥미로운 힘이었다. 대규모 온라인 브레인스토밍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리눅스, 위키피디아를 만들어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온라인 협업의 힘에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종류를 불문하고 집단 업무를 과대평가하면서 단독 업무를 희생시켰다. 우리는 온라인 집단에 참여하는 일이 일종의 단독 작업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집단 브레인스토밍은 사람들이 애착을 느끼게 한다. 창의성이 아니라 사회적 응집력이 주요한 이점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가치 있는 목표라 할 수 있다.


집단이 답을 A로 본다면, 우리도 A가 답이라고 믿을 확률이 높아진다. 의식적으로 “흠, 잘 모르겠네, 하 지만 다들 A가 답이라고 하니까 나도 그걸로 하지 뭐” 하고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날 좋아해주면 좋겠으니까, 답이 A인 척할래” 하고 말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뜻밖의, 그리고 위험한 행동을 한다. 번스의 실험에 자원한 사람들 대부분은 “우연히 동일한 정답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서” 집단과 같은 답을 했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이들은 또래가 자기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전혀 몰랐다.


2010년 미시건대학교의 한 연구에서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30년 전의 대학생들보다 공감 능력이 40퍼센트 떨어질 뿐 아니라 그것도 거의 2000년 이후에 떨어졌다는 점을 보여준 상황이기 때문이다. 연구 과학자들은 공감 능력의 저하가 소셜 미디어, 리얼 TV, ‘과열 경쟁’이 만연한 상황과 연관된다고 추측한다.


연구자들이 성격 특성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시험 중에는 피부 전도율 시험이 있는데, 잡음과 강한 감정과 기타 자극에 반응하여 땀이 얼마나 나는지 기록하는 시험이다. 고 반응성인 내향적인 사람은 땀을 더 흘리고, 반응성이 낮은 외향적인 사람은 적게 흘린다. 이들의 피부는 문자 그대로 ‘두껍고’, 자극에 영향을 덜 받고, 만져보면 시원하다. 사실 내가 대화해본 몇몇 과학자들에 따르면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 으로 ‘쿨하다’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반응성이 낮을수록 피부도 시원해지고, 사람도 쿨해진다. (그건 그렇고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는 이러한 바로미터의 극단에 있어서, 각성 수준과 피부 전도율과 불안 정도가 극도로 낮다. 이들이 편도체가 손상되었다는 증거도 어느 정도 있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내향적인 사람들을 설명해주는 또 다른 중요한 이론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플로 flow’라 명명한 상태와 관련하여 실시한 매우 다른 접근법이다. 플로란 장거리 수영이든 작사든 스모든 섹스든 어떤 활동에 완전히 몰입해 있다고 느끼는 최적 상태다. 플로 상태에서는 지루하지도 불안하지도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자기도 모르는 새 몇 시간이 지나간다. 플로에 들어가는 열쇠는 ‘어떤 활동의 결과로 나오는 보상이 아니라’ 활동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어떤 언어학 수업이었는데, 학생들이 떠드는 내용은 아예 언어학과 상관도 없는 것이었어요. ‘와, 미국에서는 말만 하면 괜찮은 건가 보구나’ 하고 생각했죠.”


이선의 부모는 양쪽 다 외향적이고 주도권을 쥐기 좋아하는 유형으로, 기업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고 골프와 테니스에 매우 열심이었다. 그들이 처음에 근심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이선은 일곱 살이었는데, 네 살짜리 남동생이 몇 번이나 그 애를 구타한 것이다. 이선은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둘째 아들의 공격성은 걱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선의 수동성이 “살면서 계속 반복될까봐” 염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