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삼부작을 다시 읽고 나니 되살아나는 기억.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는 적어도 서너번은 읽었는데 의천도룡기는 한 번 아니면 두 번 읽다 말았던 것 같다. 중반 광명정 전투까지가 재미있고 이후로는 조금 지루한 감이 있다. 나름의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이 그때가 절정이고 이후로는 그냥 최강자 + 우유부단 바람둥이.
구판에서는 프롤로그 부분의 곤륜삼성 “별건가”로 나오는데 신판은 원문 그대로 “하족도”로 나온다. 하족도 역시 뭔가 어감이 한국어스러운(…) 느낌이 있긴 한데, 중국어로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라는 의미가 있는 듯.
무당산에서 유대암과 은소소 대면 장면도 달라졌다. 기억 속에서는 은소소가 감추려했으나 유대암이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리는데 개정판에서는 은소소가 먼저 밝히고 사죄한다.
예전에 읽었을 땐 소소와 페르시아 명교 이야기가 거의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명확해졌다. 후반이 좀 지루하다 보니 내가 집중을 안 했었거나, 구판의 번역 탓도 있는 듯 하다.
마지막에 주지약의 행동이 알려지는 방식도 다르다. 구판에서는 사손이 그려놓은 것을 장무기와 조민이 발견해서 심증을 확정시키지만, 개정판에서는 주지약의 1인칭 독백으로 밝힌다. 그리고 명교를 주원장이 장악하고 장무기가 물러나는 방식도 바뀌었다.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에서는 정파나 사파 등 무림 세력에 대한 구분이 딱히 없고, 단지 구음진경의 구음백골조처럼 잘못된 길로 빠져 괴상하고 악랄한 무공이 있다는 식이었다. 구양봉이나 금륜법사 쪽도 “사파”라는 표현은 없었고 단지 타고난 성격 자체가 좋지 않거나 외국인이었을 뿐. 그런데 의천도룡기에서는 소위 명문정파라는 세력(?)이 있고, 사파와 마교라는 구분이 지어진다. 이 작품 이후로 정파 사파 마교 등의 세계관이 무협의 클리셰가 되어 국내 무협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무당파 제외하고 소위 명문정파 인물이라는 것들의 흉악함과 간사함을 많이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장취산과 은소소도 적대적인 정파와 사파의 만남이었고, 그 아들인 장무기는 다시 한족(?) 전체의 적대 세력인 몽골의 왕족과 만난다. 전체적으로 선악 구분에 대한 고찰과 금지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껴진다.
이번에 읽은 김영사 3판 완역본은 역자주가 너무 많아 오히려 읽는데 방해가 되는 감이 없지 않다… 중국 고서에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를 굳이 출처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무협을 처음 읽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겠지만, 불필요한 수준의 주석이 너무 많다.
의천도룡기도 분명히 재미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제 다시는 읽지 않을 것 같다. 구양진경 습득 후 대충 최강자가 되어버리는 과정도 그렇고, 후반에 여자들 두고 고민하고 왔다갔다 하는 것도 취향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녹정기의 위소보처럼 노골적인 것이 낫지.
다음은 천룡팔부 소오강호 녹정기다. 이후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책들도 정주행할 계획.